나이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살핌(小考)
글 장 영 주
나이
청년은 해를 세고 중년은 달을 세고 말년은 하루를 센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의 소중함은 배가 된다(어느 늙은이).
나이는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먹기 시작합니다. 빈부귀천의 차별 없이 나이는 너나없이 공평하게 먹습니다. 마치 우리 몸의 머리털이 자라듯 나이는 가만히 있어도 세월 따라 절로 쌓입니다. 시계의 초침이 째깍 째깍 내는 소리, 우리가 사노라며 쉬는 숨소리, 이것들은 나이 듦의 순간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공자가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서 자기의 나이에 따라 10년 단위로 나누어 간결하게 서술한 자전(自傳)이 논어에 실려 있습니다.
공자 가라사대 “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섰고, 마흔에 미혹하지 않았고, 쉰에 천명을 알았고, 예순에 귀가 순해졌고, 일흔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 해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子曰 吾十有五而志干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 所欲不踰矩). 여기서 우리는 나이를 제대로 먹고 있는지, ‘나이가 듦에 따라 달라지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후세 사람들이 줄임말로 정리하면서 열과 스물이 빠진 것을 보태기도 했습니다.
“열은 충년(沖年). 열다섯은 지학(志學), 스물은 약관(弱冠), 서른은 이립(而立, 뜻을 세웠다 하여 立志라고도 함). 마흔은 불혹(不惑), 쉰은 지천명(知天命), 예순은 이순(耳順), 일흔은 종심(從心, 人生七十古來稀라 하여 古稀라고도 씀)이라고 합니다. 공자는 일흔셋에 세상을 떠났으니 일흔까지밖에 말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은 백 살도 넘게 사는지라 후세 사람들이 백여덟 살까지 10년 단위를 이어받아 나이의 별칭을 지어냈습니다.
일흔일곱(七十七)은 한자(漢字) 기쁠 희(喜)자의 초서와 닮았다 하여 희수(喜壽)라 했고, 여든여덞(八十八)은 쌀 미(米)자를 풀어쓰면(解字) 여든여덞이 되니 미수(米壽)라 했고, 아흔아홉은 백에서 하나를 뺀 숫자이니 일백 백(百)자에서 위의 한 획을 떼내면 흰 백(白)자가 되는지라 백수(白壽)라 했고, 백여덞은 차 다(茶)자를 풀어쓰면 백여덞( (20)+八+八(88) = 108)이 되므로 다수(茶壽)라고 지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이 나이의 별칭은 10에 꽉 찬 나이를 가리키는 것이지 10대를 이르는 말이 아닙니다. 가령 마흔둘을 불혹이라고 하면 무식을 드러낸 것입니다. 마흔두 살의 아랫사람을 나무랄 경우라면 “불혹을 지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유혹에 빠지다니 나이를 헛먹었구나”고 해야 합니다. 또 이 나이의 별칭은 남존여비 시절의 유물이므로 여성들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남녀평등시대를 맞았으니 이제는 여성들에게 써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시 알아보기 쉽도록 정리합니다.
10:沖年, 15:志學, 20:弱冠, 30:而立(또는 立志), 40:不惑, 50:知天命, 60:耳順, 70:從心(또는 古稀), 77:喜壽. 88:米壽, 99:白壽, 108:茶壽, 이것은 상식에 속하는 것이므로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포청천, 공자, 맹자를 숭상하고 흠모합니다. 근데 포청천은 음모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45살에, 공자는 73살에 그리고 맹자는 84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중국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45, 73, 84라는 숫자를 싫어하게 되었답니다.
저는 중년 무렵에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막연히 74살까지 살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그 나이까지 살고 싶다는 기대를 한 것도 아닙니다. 한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 생각은 차츰 굳어지더니 어느새 확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구러 그 사실조차 잊고 있는 사이에 드디어 74살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어? 이러다간 84살까지 사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자라서 또 마음속에 똬리를 틀더니 <요트도서편찬모임>을 꾸려 정신없이 그 일에 매달리느라고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84살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다시 94살을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한데 하던 일이 협회의 무관심으로 정체되어 있는 동안 사정이 풀리기를 기다리는 사이에 90살을 지난 지가 2년이 되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저는 이미 떠날 채비를 마쳤습니다. 언제 죽음이 제게 닥칠지라도 기꺼히 맞이할 준비 말입니다. 따라서 84살부터는 덤으로 사는 것이니 재능기부로 열심히 봉사할 생각입니다.
저의 경우가 그렇다 해서 누구든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살 거라는 과학적인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쩌다 우연히 “쇠발에 쥐잡기”로 저의 생각이 두 번 들어맞았을 뿐입니다. 삶에 대한 나이의 한계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이가 들면 누구나 죽습니다. 그러므로 나이에 무게를 실으며 늙어야 합니다.
나이에도 무게가 있습니다. 그 무게는 지식과 경험이므로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공부로 지식을 얻고 일을 통해 경험을 쌓으면 누구나 나이에 무게가 실립니다.
서양의 격언에 “집에 노인이 없으면 빌려다가라도 모셔라”고 했습니다. 노인의 지식과 경험을 소중히 여기라는 뜻입니다. 요즘의 우리 사회는 이러한 격언의 뜻을 잊고 있습니다. 노인의 풍부한 지식과 경험에서 우러난 삶의 지혜가 존경받기는커녕 젊음을 방해하는 쓸데없는 존재로 생각하고 배척합니다. 어른을 홀대하고 배척하는 사회는 문명사회가 아닙니다. 주변에 어른이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길 때 발전도 그와 함께 묻어 옵니다.
현대인은 늙어감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름살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예방하고 감추고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깁니다. 이로 말미암아 오늘날 우리나라의 늙은이들은 “뒷방영감”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라가 혼란스러워도 나서는 원로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패기와 에너지를 그리워하면서도 모두가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 시절의 방황과 혼돈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면 삶을 잘 이해하게 되고 더 이상 무의미한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이 시기가 되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며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일단 이러한 것들을 깨닫고 나면 누구도 그것들을 젊음과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식과 경험을 쌓아 지혜롭고 묵직한 나이로 늙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어려운 일일수록 이루려고 애써야 하는 것이 삶의 가치요 목표가 돼야하지 않을까요?
잘 늙으려면
나이 듦은 곧 늙는다는 것입니다.
나이에도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나이의 무게는 지식과 경험입니다.
잘 늙은이의 나이는 무겁습니다.
무거운 나이의 늙은이는 존경받습니다.
가벼운 나이의 늙은이는 무시당합니다.
묵직한 나이는 지식과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지식과 경험은 곧 삶의 지혜입니다.
나이가 저절로 지혜를 주지 않습니다.
지식을 얻으려면 공부를 해야 합니다.
경험을 쌓으려면 일을 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꾸준히 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려워도 일을 하려면 해야 합니다.
젊었을 때의 방황을 늙어서야 후회합니다.
늙음은 죽음이 문턱에 있다는 것입니다.
잘 늙으려면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일과는 하찮은 것도 거르지 말아야 합니다.
미루거나 접으면 다시 할 기회가 없습니다.
오늘 옳고 바르지 못하면 다시는 그럴 수 없습니다.
할 일을 미루면 죽음이 구겨집니다.
의롭게 사는 것이 곧 잘 늙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사는 것과 잘 늙는 것은 하나입니다.
묵직한 나이로 늙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는 과연 묵직한 나이로 잘 늙고 있을까요?
삶과 죽음
삶에는 반드시 죽음이 따른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은 하나다.
me·men·to mo·ri.
신이 우리 인간에게 내려준 가장 큰 축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누구도 죽음의 순간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만일 신이 언제 죽는다는 것을 인간들에게 미리 알려 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우선 죽음의 시기가 다가오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것이므로 사람에 따라서는 생각지도 못한 별의별 일을 다 저질러서 사회를 혼란에 빠뜨릴 것입니다. 그러니 이보다 더 큰 축복과 은혜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태어난 자는 누구나 한 번은 죽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한 번만 통과하면 될 공포의 문을 수백 번 수천 번 통과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정말로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질병과 죽음 자체일까요 아니면 이에 대한 거부에서 오는 걱정과 불안일까요?
이에 대해 성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목숨을 한 시간인들 늘릴 수 있겠느냐?” 우리나라의 옛 속담에도 “걱정이 반찬이라면 상다리가 부러지겠다”고 했습니다. 죽음에 대하여 제자가 공자에게 묻자 스승은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未知生焉知死)라고 대답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일랑 접어 두고 삶에 열중하라는 일침일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앞에 놓고 죽음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삶은 죽음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직감으로 깨달았다고" 합니다.
죽음에 대해 신비가 다스칼로스는 이리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닥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는 동안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값진 삶인지에 대해 늘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그것을 실천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잘 산 인생이란 출세하고 돈벼락 맞은 인생이 아니라 의(義)를 저버리지 않고 굳건히 지키며 끝까지 자기 양심에 따라 소임을 다하는 인생이다.” 인간이 때때로 빗나가게 되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노자는 그의 도덕경에서 간결하게 정리했습니다. “넉넉한 줄 알면 욕되지 않고(知足不辱),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知止不殆), 이렇게 하면 길고 오랠 수 있다.(可以長久).” 하찮은 자리와 돈에 홀려 자질도 모자란 자들이 완장 차고 나대며 설치는 꼴들은 자기의 욕심에서 비롯된 행태이니 절대로 욕되고 위태로울 뿐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신비가 다스칼로스는 제자들에게 이리 가르칩니다. “카르마(karma)는 업(業)이요 인과응보의 법칙입니다. 한 사람의 행위와 사고와 느낌의 총합으로서 이것이 그 사람의 존재 상태를 결정짓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카르마, 곧 운명의 창조에 전적인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테오시스(theosis, 자아가 거듭된 환생을 통해 3차원인 거친 물질계의 경험을 쌓은 뒤에 성취하는 진화의 마지막 단계, 신과의 재합일)의 성취만이 카르마의 법칙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법망(法網)은 촘촘한 것 같으면서도 구멍이 숭숭 뚫려 있습니다. 하여 돈이 있거나 권력이 있거나 인맥을 통해 재간을 잘 부리는 자들은 그 그물에 난 구명을 통해 잘 빠져 나옵니다. 그러고는 자기들이 잘나고 똑똑하고 재간이 좋아서 그랬노라고 으스댑니다. 그러나 하늘의 그물은 누구도 빠져 나가지 못합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늘의 그물은 성긴 것 같지만 놓치지 않는다(天網恢恢 疎而不漏)” 이것이 바로 조물주의 섭리요 우주의 질서인 카르마의 법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도 카르마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테오시스의 성취나 스스로 참회하여 사죄함으로써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남긴 언행과 생각 그리고 심지어는 느낌까지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기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잠재의식 속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아카식 레코드처럼 말입니다. 그것들은 염체(念体)로 남아 있다가 부메랑처럼 언젠가는 우리에게 죄값을 치르도록 되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당대에 내게 오지 않았다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자식과 손자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뿐 아니라 다음 생애까지도 따라다닙니다.
이 카르마의 법칙과 염체의 원리에 대해 구성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마침 신비가인 다스칼로스(그는 그리스계로 사이프러스에 산다)가 제자들에게 강의하는 자리에 미국 대학교수 두 사람이 참관했는데 강의를 마친 뒤, 이 두 교수들과 질의응답하는 주제가 바로 이에 관한 것이었기에 좀 길지만 구성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전문을 소개합니다. 한 사람은 사회학자로 다스칼로스를 연구하기 위해 휴년을 맞아 장기 체류 중이고 다른 교수는 심리학자인데 그의 동료로서 잠시 방문한 것입니다.
다스칼로스의 강의가 끝나고 헤어질 무렵 심리학자인 동료 교수는 다스칼로스의 말을 곰곰이 새겨보다가 말했습니다. “헤어지기 전에 한 가지 제 동료가 연구한 내용을 이야기해 드리고 싶군요. 그것은 눈물의 화학적 성질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양파를 썰 때 나오는 눈물처럼 강제에 의해 나오는 눈물은 슬플 때 흘리는 눈물과는 그 화학적 성분이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양파를 썰 때 나오는 눈물에는 독성이 없지만 슬픔의 눈물에는 진짜 독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주장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서는 남자들이 슬퍼도 여자들처럼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되게 되어 있는데 그는 이 독이 위궤양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성이 여성보다 위궤양에 걸리는 비율이 높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더 쉽게 표출함으로써 체내의 독을 배출하지만 남자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도 이론에 머물고 있기는 하지만 당신에게 흥미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당신 동료의 발견에 수긍합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지요.” 다스칼로스는 이렇게 대꾸하고는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은 말하자면 일종의 투명한 피입니다. 그것은 출혈과 비슷한 것입니다. 손가락을 베어서 피가 흐른다고 생각해 봅시다. 흐르는 피의 성분은 당신의 감정적 상태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스트레스와 노여움에 차 있는 사람의 피와 고요하고 평온한 사람의 피를 분석해 보면 그 화학적 성분이 뚜렷이 다른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동료가 눈물에서 발견한 것과 비슷하지요. 그리고 이것을 알아 두세요. 눈물이나 혈액뿐만 아니라 오줌과 침까지도 포함한 모든 체액 성분의 총합은 그 사람의 정신적 상태에 상응한다는 것입니다. 왜냐구요? 물질은 에테르(ether, 氣, 프라나, 바이오 에너지) 에너지의 지배 아래 있는데, 이 에너지는 고요하고 평온한 진동 상태에 있을 수도 있고 격렬한 진동 상태에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성질 나쁜 아이로 소문난 한 소년이 화가 나서 다른 아이를 이빨로 물었는데 물린 아이에게 독이 퍼진 일을 본 적이 있습니다. 화가 치민 상태에서 소년의 침은 완전히 독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그가 마음이 가라앉은 뒤에 침을 조사해 보았을 때는 독성분이 없었습니다. 침의 화학적 성분은 그 사람의 정신적 상태를 반영합니다. 그것은 동물에게도 마찬가지지요.”
“다스칼로스, 저는 성수(聖水)에도 비슷한 원리가 적용된다고 생각해요. 제가 알기로는 일부 학자들이 성화(聖化)된 물의 화학 성분은 보통 물의 성분과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사회학 교수가 덧붙였습니다.
“맞아요. 그것이 물질에 미치는 생각의 영향입니다.” 다스칼로스가 말했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들이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염체(念体)의 힘입니다.” “당신이 ‘염체’라고 부르는 그것에 대해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심리학 교수가 물었습니다.
“모든 생각과 욕망은 심령적, 이지적 에너지를 지니고 있어서 그것이 주변에 투사됩니다. 일단 이 ‘염체’들이 밖으로 나오면 그것은 일정한 형체와 고유한 수명을 지니고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염체는 그것을 투사한 사람과 동일한 주파수로 진동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미칠 수 있습니다. 진리의 탐구자들은 자기 분석과 적절한 명상수행을 통해 다른 이들을 돕는 자비로운 염체만을 투사해야 합니다.”
다스칼로스는 이어서 사람은 자신이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염체와 항상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외부로 투사한 모든 종류의 생각과 욕망 즉 염체들은 이 생에서든 다음 생애에서든 결국 우리에게 돌아오며 이것이 카르마의 법칙이 작용하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고 말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의 설명이라면 우리가 끊임없이 투사하는 염체에 따라 카르마의 원리가 작동하는 방식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젊었을 때부터 집단생활(군대, 직장, 단체를 포함)을 하면서 참으로 이상한 경험을 했습니다. 어느 집단에서든 저를 까닭없이 시기하고 미워하는 사람(물론 한둘이었지만)은 꼭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 저는 그러거나 말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해 왔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미워하거나 저주하지도 않았습니다. 한데 그들에게도 반드시 좋지 않은 일들이 생겼습니다. 죽거나 불행한 일을 당했습니다.
요트계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몇 해 전에 포항에서 국제군인체육대회의 요트경기를 벌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늦은 밤, 12시가 지났는데 전화벨이 울리기에 받아 보니, 알듯한 목소리였습니다. 혀가 꼬부라져 있었고 동석한 이들의 말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임원들(당시의 부회장들)이 술판을 벌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전화를 건 자는 다짜고짜로 횡설수설 주제가 없는 욕설을 퍼붓기에 한참을 듣다가 “술판을 벌렸으면 술이나 마실 일이지 밤이 깊었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 할 말이 있으면 맑은 정신에 할 일이지.” 호되게 나무라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옆에서 집사람이 듣고 있었는데 민망하기도 하고 창피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우리집 전화번호를 아는 자는 이아무개밖에 없습니다. 아마 술판에서 저를 안주삼아 씹다가 그것으로는 모자랐던지 전화번호를 알려 주고 부추기자 그가 술김에 만용을 부려 총대를 메고 나선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상대에게 욕을 해도 주제가 있어야 합니다. “너는 언제 내게 이러저러한 일을 했으니” 하고 욕을 해야 하는데 그는 덮어놓고 욕지거리를 퍼부어 대는지라 참으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90평생 이렇듯 대놓고 하는 욕설을 듣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교도소 담벼락 위를 서성거리는 것을 막고자 행동으로 옮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신상을 보호하고 단체의 발전을 꾀하고자 하는 시도였습니다. 소갈머리 없는 철부지들인지라 아마 그것에 대해 앙심을 품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이 남았던지 그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습니다. 성서에 이르기를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정직한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구약성서 잠언 29:27)고 했습니다. 동물도 제 새끼에게 해를 끼치려는 것에 대해서는 사생결단으로 덤빕니다. 카르마의 법칙에 따르면 자기가 지은 죄값은 2대 3대에까지 미친다고 했는데 자기 욕심 때문에 다음 세대에까지 자기의 죄값을 치르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짐승보다 못한 짓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그 대회를 통해서도 불의한 짓을 또 저질렀습니다. 그러고는 구성원들을 감쪽같이 속였노라고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이 지면을 통해 다음 성구(聖句)를 띄웁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두려워하지 마라.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마태복음 10:26). “밤 말은 쥐가 듣고 낮 말은 새가 듣는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구성원들을 속이고 들통나자 셀프징계하고 사법기관의 맛사지를 받았다 해서 “에헴”하고 큰 기침하며 으스대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돈도 권력도 인맥도 통하지 않고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하늘 그물인 카르마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어제의 범죄을 벌하지 않은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것이다.”(알베르트 까뮈). 이거야말로 이들에게 딱 들어맞는 경구(警句)라 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누군가가 그에 대한 궂긴 소식(訃音)을 전해 주더군요. 요트계에서 저를 까닭없이 괜스레 시기하거나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를 포함해서 이미 세상을 떠난 이가 여남은 명에 이름니다.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직 살날이 많이 남았는데 요절했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헛되고 헛되며 어리석은 삶입니까?
문제는 그러한 부류로 아직 살아있는 이들도 그 숫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다고 해서 카르마의 법칙을 깨뜨릴 수는 없습니다. 오직 그들 스스로가 참회하여 사죄(赦罪)를 구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죽은 이나 산 자나 나이로 치면 다 저의 아들이나 조카뻘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래 산다는 것은 이래서 욕된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거듭 태어나는 것은 테오시스를 이루어 신과 하나가 됨으로써 영생을 얻기 위함입니다. 성서에 이르기를 “세상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말라”(Be 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고 했습니다. 언뜻 들으면 모순된 말 같기도 합니다. 3차원의 물질계에 살되 다른 더 높은 차원의 심영적(心靈的), 이지적 심성을 저버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물질로 살지만 물질에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몸살림을 호화롭게 하자고 이승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호화사치스럽게 사는 이들을 부러워할 것도 시샘할 것도 없습니다. 하찮은 자리와 돈에 홀려 양심을 버리고 불의를 저질러서 일을 그르치게 하는 자들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간디로 칭송받는 多夕 柳永模 선생의 어록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칩니다.
“못된 놈 처놓고 영특하지 않은 놈이 없다. 우리 눈앞에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못된 놈들이 잘된다. 잘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서는 잘 먹고 잘 살고 권력있고 떵떵거리고 사는 것을 잘된 것으로 본다면 대개가 못된 놈들이 그렇게 산다. 그 꼴을 보고 시샘하다가는 실족(失足)한다.”(류영모<多夕어록>)
우리가 카르마의 법칙과 염체의 작동하는 원리를 이해한다면 어떻게 살다가 죽어야 하는지는 자명해집니다.(다스칼로스와의 대담 내용은 <사랑의 마법사 다스칼로스>에서 따온 것입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
나와 함께 일한 이들은 나를 알 것이요.
나를 아는 이들은 두 갈래로 나뉠 것이요.
의로운 이들은 나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요.
불의한 자들은 나를 시기하고 미워할 것이요.
의로운 이들은 구원을 얻어 거듭날 것이요.
불의한 자들은 사리(私利)만을 좇을 것이요.
그들은 그로 말미암아 죽음을 앞당길 것이요.
그들의 나이는 깃털처럼 가벼울 것이요.
그들의 정신 사지(四肢)는 뒤틀려 있을 것이요.
그들의 고질병은 이름병과 돈병일 것이요.
그들의 차크라는 거꾸로(왼쪽) 돌 것이요.
그들의 사생활은 정상이 아닐 것이요.
그들의 가정은 온전치 않을 것이요.
그들은 불의한 짓을 멈추지 않을 것이요.
그들은 되레 패거리를 지어 기승을 부릴 것이요.
나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기도할 것이요.
그러나 나의 기도는 카르마의 그물을 뚫지 못할 것이요.
그들은 스스로 회개하지 않을 것이요.
그들은 그로 말미암아 카르마의 법칙에 따라 패망할 것이니
그러므로 누구나 의롭게 사는 것만이 생명의 길이니라.
낱말풀이
차크라(chakra):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법어)로 사람의 에테르(ether) 복체에 있는 심령, 이지적 중추. 한 인간은 자신을 지탱해 가기 위해 이 차크라를 통해 에너지의 생명력을 흡수한다. 신비가는 적절한 명상과 훈련을 통해 차크라를 엶으로써 심령 이지적 능력을 얻는다. 투시가(透視家)에게 차크라는 회전하는 원반처럼 보인다.
에테르 복체(複体 ether double): 거친 육신, 심령체, 이지체들의 세 가지 신체를 살아있게 하고 서로 연결되게 해 주는 에너지 장(場). 신체의 입자 하나하나는 상응하는 에테르 복체를 가지고 있다. 치유가 일어나는 것은 에테르의 생명력 때문이다. 우주는 에테르의 에너지로 꽉 차 있다. 그것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해질 수도 있으며 차크라를 통해 흡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