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로 알려진 '이종환'님은 "윈드서핑" 개척자 였어요

|2013-06-13|조회수: 3463

 DJ로 알려진 고 이종환 님은
우리나라    "윈드서핑 개척자" 였읍니다.
큰 족적을 남겼지만 윈드서퍼들에게는 잘 알려지지도 않은체 그냥 세상을 버려 안타깝네요.

윈드서핑의 원로들이  후세대 윈드서퍼들을 위해  "풍우회" 라는 조직을 만들면서
이종환님을 만장일치로 초대회장으로 추대하였는데 초대회장을 하기로 수락하였음에도 당시 MBC에서 최유라와  방송을 하면서 미루고 미루다  알려질 기회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질 못하고서
그냥 떠나 벼렸었네요. 

초창기 실지 '윈드서핑'도 많이 탓습니다
광나루 워커힐 아래 쪽에서 탓습니다.  많은 가수들이 함께 왔지요. 특히 만능 스포츠맨였든 남궁옥분이 적극적이었고.
바로 건너편 광나루에서는 권희범씨가 탓지요. 권희범씨 집이 천호동이라서. 바다훈련은 연포나 제주 성산포에 가서하셨지만 권희범씨로 부터 우리나라에 윈드서핑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할수가 있고요..

  
생전에 이종환님이 "윈드서핑"을 타든  모습

                  
               추 모 사

 이종환님은 오늘
2013년5월30일 새벽 1시경에 우리와 유명을 달리 하였습니다

님은 우리나라의 윈드서핑을

개척하여 주셨고  누구보다도 윈드서핑 발전을 위하여 정력을 다 바쳤습니다.

그러나 윈드서핑을 타는 사람들에게 이 같은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라디오 DJ로만 알려져 왔습니다.


님은 권희범씨와 더불어 

윈드서핑을 누구보다 일직이 배워 타기 시작하였습니다. 직업이 방송국 DJ였음으로 방송을 통하여 윈드서핑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이 땅에 윈드서핑을 알려주고 또  발전시키기 위하여 헌신을 바쳐 왔지요


70년대부터 80년 말까지

님은 매일 밤 10시부터 12시까지 두 시간 동안 MBC 라디오 “이 빛나는 밤에"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였지요. 이 방송을 진행하면서 시원한 파도소리와 함께 특유의 분위기 속에 윈드서핑을 개척하여 왔었지요.  당시 이 프로그램은 젊은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는데 그 감미로운 윈드서핑 이야기는 윈드서핑 보급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78년쯤에 명동에서

"셀부르"라는 맥주 집을 차리고서 여기에서도 윈드서핑 보급 발전에 전력을 다하였지요.

맥주집 입구에 처음으로 보게되는 윈드서핑 보드를 여러 개 나열 놓았지요.  무대에도 윈드서핑 세일로 붙여 온통 윈드서핑 무대를 만들어 놓았지요.

송창식 조영남 서수남등 당시 인기가 있었던  통기타 가수들이 직접 출연하는 라이브 무대였지만 이들 유명 가수들에게도 앞으로 윈드서핑을 배우지 않겠느냐고 다짐을 받기도 하였지요.


1980년 권희범씨가

부산 태종대에서 윈드서핑을 타고 일본 대마도까지 현해탄 횡단을 함으로서 우리나라에 윈드서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지요. 그때 독일인 라인하르트 바위시씨의 재정적인 스폰으로 횡단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님이 권희범씨에게 용기를 갖고 출발하도록 한 그 격려도 컸습니다.  님의 그 격려가 없었더라면  과연 권희범씨가 출발을 할 수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님께서 하신

윈드서핑을 개척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하신 그 위대한 업적들을 여기에 다가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


윈드서핑 인구가 점차 늘어나

이제 윈드서핑도 우리들만의 협회 창설의 필요성이 대두 되었을 때  한국에서 최초의 윈드서핑협회라고 할 수 있는 “한국윈드서핑연맹”을 창설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지요.

연맹장까지 역임하시면서 한국의 윈드서핑 발전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1983년 초에는

홍콩에서 열렸든 “아세아윈드서핑국제대회”에 직접 다녀오기도 하셨지요.

해양소년단의 지원이 있었지만 당시 어려운 여권을 발급받아 한국 윈드서핑 팀이 결성이 되어져 해외에 까지 나갈 수 있었든 것도 님의 빛난 위업입니다.  다녀오신 후 1983년3월13일자 일간스포츠에 님이 남긴 "윈드서핑국제대회 참관보고서"는 우리나라 윈드서핑 역사에 너무나 귀한 자료입니다.


해외경기 참관보고서에서

1983년 그 당시 우리나라 윈드서핑 인구가 불과 300 여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지만 이 윈드서핑은 우리 한국인의 체격에 맞는 종목 같다고 하면서 자신감을 갖고 발전시켜보자고 하였습니다.  이 우리나라 최초 해외 경기리포트에 담겨져 있는 님의  윈드서핑에 대한 열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막상 이 세상을 하직하니

님이 윈드서핑에 불태운 그 열정과 공헌을 세상에 미처 알려 지지 못한 점이 서운합니다.

원로들이 풍우회라는 모임을 결성하기로 하고 초대회장에 님을 모시기로 하였지요.

님께서도 초대회장직을 하기로 흔케히 수락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끝네 회장직을 하지도 못하고 떠나고 말았습니다.  풍우회 회장을 하면서 그 공헌들을 세상에 알리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이제 님과 윈드서핑 이야기를 더 할 수 없음을 슬퍼하지만 님이 윈드서핑에 바친 그 위업과 열정을 우리는 오래도록 애기를 할 것입니다.


부디 영생의 쉼터로 가셔서 편안 하옵소서.  


2013년 5월 30일

한국윈드서핑협회

명예회장

정상대 드림



 이종환님의 "윈드서핑 국제대회" 참가보고서 (1983년 3월 13일자 "일간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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